-끝낼 때가 온 것 같아. 미안해.
-이 개새끼가─
무언가 날라오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대로 물을 맞았다. 온 몸을 적시는 차가운 액체는 눈을 감게 만들었고, 이내 속눈썹과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잠깐 맛 본 그 맛은 지금 상황과 같이 텁텁하면서도 미끄러운 석회수 맛이었고, 그와 동시에 제 앞에서 울고 있는 대니를 가만히 응시하는 자신처럼 차가울 뿐이었다. 일몰의 밀밭처럼 갈색 속눈썹이 풍성하게 덮은 대니의 푸르른 눈은 변함없이 전처럼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제가 만든 눈물로 인해 하염없이 발갛게 번져 있었다. 수많은 눈물을 흘려도 상황도, 마음도 그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었다. 톰은 말 그대로 무표정하게 대니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쩔 줄 몰라했던 그 울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지다니, 톰은 이번만큼은 제 자신이 단단히 마음 먹은 것이라 생각했다. 열꽃이 피듯 옅은 주근깨가 진 대니의 얼굴에 붉은 홍조들이 잔뜩 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대니는 달아올라 물기 진 눈을 제 손으로 덮고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톰은 그제야 곁에 있던 냅킨을 집어들어 대니의 앞에 조용히 놓았다. 같이 지낸 세월이 길어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일까. 톰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그저 대니를 기다려주었다. 조금 진정이 된 것인지 마지막 한숨을 내뱉은 대니는 톰이 건네 준 냅킨을 집어 들어 눈가를 닦고 그에게 물었다.
-토마스.
-응, 다니엘.
-사람을 불러다 놓고 한다는 말이 겨우 이런거야?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잘 알지. 하지만...
우린 헤어지는게 맞아. 격해지는 감정과 더불어 두 번째는 옆에 있던 포도주스였다. 대니가 늘 좋아했던 것으로 그가 항상 시키는 것이었다. 달짝지근한 맛과 비교되는 그 상황이 적잖이도 어색할 만 했건만 톰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더 한것이 날아올 상황도 생길 수 없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을 내뱉던 입에서 끝까지 말하지 말았어야하는 비참하리 만큼 잔인한 말이 나왔다. 대니는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얼마전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톰이 이렇게 한 순간에 변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드라마 속 주인공 마냥 물을 뿌리는 상황도 생겼지만 톰은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처음 톰을 본 순간부터 함께한지 벌써 몇년이 되어가는데, 끝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톰, 뭐라 말 좀 해봐...
-미안해. 그냥...내가 다 미안해.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젖은 얼굴과 머리를 몇 번 털더니 카페를 나가버렸다. 한창 때의 파도가 지나가고 자리에 남은 대니는 제 연인이 정말로 저를 저버렸단 사실에 멍하니 그가 나간 문밖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쌓아 놓은 모래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네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을까, 내가 다가 갈수록 넌 더 밀어냈었는데...
톰과 헤어지고 며칠동안 대니는 죽은 사람마냥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톰이 존재하지 않는 하루를 견디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괴로워졌기에 한 동안 풀린 눈동자로 순백색의 천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흰 천장의 무늬가 몇 개인지 세어 가기도 지쳤을 무렵, 대니는 드디어 톰에 대한 생각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었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다고 했던가. 대니는 처음 톰을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제가 미쳐버리기 전에 이렇게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숫기없고 낯을 가리던 톰은 처음에 저에게 다가오는 대니를 불편해 했다. 그와 달리 톰의 부드러운 인상과─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올 것 같이─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말간 얼굴에 대니는 이미 빠져버린지 오래였지만. 대니는 한동안 톰의 팬을 자처하듯, 집요하게 톰을 따라다녔다. 누가봐도 외향적이어 보이는 체육계의 또래가 너드인 자신에게 다가와 경계심을 양껏 세운 톰이었지만 대니의 노력이 통하기라도 한 건지 톰은 점점 대니에게 맘을 열어갔다. 그럼에도 대니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면 톰은 이내 밀어냈지만 그건 대니에게 문제 되지 않았다. 대니는 그저 톰이 더 이상 예전만치 자신을 피하지 않는 것 그자체로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가까이 가기를 반복했던 어느 날 대니는 톰에게 자신의 축구경기 티켓을 건네주었다. 솔직히 톰이 받아줄 지 안 받아줄지는 도박이었지만 그에게 축구부 활동을 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톰이 스포츠를 싫어할 수 도 있었지만 대니는 이미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톰에게 티켓을 건네주는 것 만으로 대니는 이미 많은 용기를 낸 상태였다. 톰은 처음에 티켓을 받고 영문 모를 표정을 짓다가 귀끝까지 빨간 채 손끝을 꼼지락거리면서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대니를 보고는 이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제가 경기 하나 보러가는게 뭐라고 저리 수줍을까. 톰은 빙긋 웃으며 대니에게 본인 좌석은 어디로 해야 하냐며 대꾸했다.
-좌석? 좌석이 왜...? 그냥 앉으면 되는ㄷ
-바보야. 네가 가장 잘 보이는데로 앉아야 할 것 아냐.
나는 널 보러 가는건데. 톰의 말에도 대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인이 필드를 뛰면 어차피 어디서나 볼 수 있을텐데 대체 왜 좌석이 문제가 되는건지 알 수 없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고장난 로봇마냥 어색하게 행동하는 대니에 톰은 그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제대로 말해주었다.
-난 순전히 널 보러가는거야, 축구 경기가 아니라. 그러니 그나마 네가 제일 잘 보이는데 앉아야지.
-아─ 토마스, 너란 사람은 정말...
- 빨리 좌석이나 알려줘, mate.
대니는 이제 목끝까지 붉어져 그만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주저앉은 대니에 놀란 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걱정스레 제 상태를 살피는 톰을 손가락 사이로 훔쳐 본 대니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밖에라는 그 생각 하나.
+++
-문 좀 열어줘, 내가 보고싶지 않아?
날 위해서라도, 제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힌지 벌써 20분째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않고 언제나 자리를 지키는 대니가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분명 나에게 잘보이겠다고 매일 생머리로 펴내던 머리는 비에 젖어 곱슬거리겠지. 밝은 브루넷 머릿결은 여기저기 젖어서 눈을 찌르고 어둑해질거고. 또.
-난...네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네가 필요해. 얼굴만이라도 제발. 그 말을 끝으로 절규하듯 우는 대니의 목소리에 톰은 그저 얼굴을 쓸어내리며 현관 벽에 기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현관문 유리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대니의 얼굴은 분명 눈물로 엉망이 돼 있었겠지만 제가 닦아줄수도 같이 울어줄 수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대니를 위해서였다. 그래, 전부 대니를 위해서다. 모질게 그를 밀어낸 것도 지금도 여전히 밀어내고 있는 것도 모두, 그를 위해서였다. 자신이 그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완벽해지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우리가 우리 이름을 모래 위에 새겼던 그때 생각나?
그때 네가 나보고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영원하자고. 대니와 만난지 몇년이 지난 시점에 급작스럽게 여행을 떠난 때가 있었다. 그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바닷가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어린 애 같이 모래 사장에 글씨를 쓰며 서로를 바라보고는 사랑한다 말했었다. 방해할 것 하나 없었고, 두려울게 없었으며 절실히 서로를 사랑하던 때였으니까. 톰이 대니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톰은 대니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사랑했었고, 대니에게 이별을 고한 지금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토마스. 대니가 문 너머로 정적이 일자 톰을 불렀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잖아.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외침이었지만 대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일 다시 올게, 매일, 언제라도 다시
네가 날 받아줄 때까지. 걸어가는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멎고 빗소리만 더욱 커졌다. 톰은 그제야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현관 콘솔에 놓인 같이 끼던 커플링은 이미 먼지가 끼여 앉아있었다. 채광이 들지않는 집에서 채워지지않는 외로움을 양껏 느끼며 눈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뜨거움이 온 몸을 들썩이게 했다. 대니가 보고싶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미친듯이 그가 그리웠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갈라지는 목으로 입에도 담기조차 어려운 그 말을 물기 어린 가느다란 떨림으로 전하는 것 뿐.
-모든게 널 위해서였어, 대니
톰은 이제 대니의 환영을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움은 환각과 환시로 바껴 그의 일상에 맴돌았다. 식탁에서 같이 팬케이크를 먹던 대니의 모습, 메이플 시럽이 안나오면 시럽 통을 위로 높이 치켜들고는 중력을 이용한다며 엉뚱한 짓을 그 모습이 눈 앞에 생생했다. 하루하루 그를 그리워하다 메말라 가는 것 같았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로 이제는 감히 입에 담기도 힘든 그 이름을 읇조렸다. 다니엘. 사랑스런 내 다니엘.
-네가 너무 그리워, 네가 너무 보고싶어.
-아직 널 사랑하는데, 다니엘.
내가 이제와서 너에게 뭐라 말을 해야할까.
+++
-널 울렸던 그 말들은 전부 진심이 아니었어
톰이 말했다. 자신이 말하면 안될 말인데 참지 못해 말하는 것 마냥 금방이라도 죽을 표정이었다.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었는데, 널 잊는게 너무 어려워
-...
-그래, 후회하고 있지. 내가 너에게 했던 잘못들에 대해...
Posted in C/OTP of McFLY.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