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혁은 강의실 바깥 의자에 앉아 은표를 달래는듯 했다.
강의는 왜 안듣는다냐. 수혁이 넌지시 은표에게 물어왔다. 그냥이라고 답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았지만 다 년간 수혁을 봐온 은표는 절대로 수혁이 그런 이유로 제가 강의를 빠졌다는 걸 이해 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물음에 답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는 은표가 얄미운건지 수혁은 볼을 한껏 부풀렸다.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수혁은 김이 샜다는 행동을 취하곤 은표를 지나 강의실로 향했다. 언제였더라. 은표는 자신이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던 날들이 언제인지, 수혁을 처음 봤을 때를 빼곤 기억이 가물한 그 기억들을 곱씹어 보았다. 처음 수혁은 본 날은 저 남자 공부 잘하게 생겼네, 같은 시덥잖은 감상평들이었다. 자신과 같은 교양과목을 듣던 김수혁이란 남자는 빨간 체크셔츠와 베이지색의 면바지를 입고 있었고, 또 도수가 꽤 되어 보이는 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안경때문인지 눈 주위가 흐릿한 탓에 인상은 딱히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김수혁, 김, 수혁...김수혁.
-왜 이리 날 애타게 불러?
-야, 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지금 강의시간 아니야?
-그게 대수냐, 가자!
우리 집에 가서 삐루나 먹자. 수혁의 당당한, 술자리를 가장한 땡땡이에 은표는 그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깨를 덥석 잡고 저를 끌고 나가는 수혁에게 이끌려 건물을 나오고 나서야 은표는 정문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다. 자잘하고 빼곡하게 차있는 나무와 의자들 사이로 있는 학생들과 비가 온 뒤로 녹이 슬어버린 동상들, 대학 정문을 보며 아쉬운듯한 표정을 짓고 이내 수혁을 바라 보았다. 은표의 시점에서 보는 수혁은 시원시원하게 생기는 듯 했지만 또 어딘지 모르게 섬세하게 생긴 듯 했다. 은표는 옛날부터 수혁의 그런 점이 맘에 들었다. 입고 다니는 꼴이랑 다르게 생긴 건 멀끔하게 생겼단 말이지. 은표는 문득 이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혁아
-어? 어, 은표야.
-너는 변하지마라.
-저기 저 앞에 동상 보이지?
넌 저렇게 변하지마라, 몇 년이 지나더라도 내가 알아볼 수 있게, 그 시간 그대로. 은표의 당돌하다 못해 직설적인 발언에 수혁은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은표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활짝 웃으며 수혁이 말하는 동안 수혁이 웃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은표의 갈색 눈이 햇빛을 받아 옅게 반짝이곤했다.
-그래. 안 변한다, 안 변해.
-약속할게, 됐지?
은표야, 은표야. 수혁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건 오롯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었다. 수혁은 아려오는 무릎에 애써 아픈 신음을 씹어삼키며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살려주세요, 제발. 귀를 찢어 파고드는 포탄 소리와 총 소리에 움찔대다가도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수혁은 그렇게 살려달라 빌고있었다. 유일한 살 길 인듯 십자가를 쥔 손이 이제는 처량해 보일 지경이었다.
-수혁아!
-은표, 은표..은표야! 어딨어!
-수혁아, 괜찮아?...정신차려, 어?
-은표야, 나 좀 살려줘...
살고싶으면 일어나, 알았지. 빗발치는 총 소리 속에서 수혁과 은표는 가까이서 죽어가는 전우들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유는 없었다. 대학 동기로, 누군가의 아들들로, 학사 장교와 일반 병사로, 또 전쟁에 참전된 군인으로 이 의정부까지 온 지금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인민군이 조금 더 유리한 위치였고, 수혁과 은표는 이제 갓 군대에 들어온 신참일 뿐이었다. 왜 싸우는지, 왜 참전되었는지 진짜 이유도 알지 못하는 새파란 청춘들이었다.
-은표야 살려줘, 나 살려줘...
참호 속의 진흙과 물이 섞여 질척해진 발 때문에 자꾸만 걸음이 느려졌다. 어서 올라가 이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은데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이 빠지는 바람에 발목이 잡히고 있었다. 겨우 참호를 지나 오르려던 순간 포탄이 근처로 내려 앉았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혁과 은표는 그렇게 국군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부상병들은 치료하고, 고향으로 보내줘라. 해방조국에서 만나자우!
-은표야...
-수혁아! 놔 줘!
-은표야, 은표야...!
-수혁아...
생이별을 하게 되는 연인처럼 애타게 서로를 불러댔다. 장정 2명에게 납치되듯이 끌려가는 수혁을 향해 소리치는것 말고 은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혁이 지나간 자리에는 십자가와 함께 묶여진 수혁의 군번줄만 남아있었다. 김수혁, 제 손에서 잃어버린 친구의 이름. 몇 없는 소중하고, 또 사랑하는 이의 이름. 댐이 터지듯 한번에 감정이 밀려오는게 이런걸까. 은표는 수혁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울음을 씹었고, 씹힌 입안에선 쇠맛과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너를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동부전선이요?
-동부전선에, 후...빨갱이랑 내통하는 놈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싹 다 죽여버려야 돼, 개새끼들. 상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악어중대, 동부전선. 모두 최전방에서 지금 협상을 위해 옥신각신 하고 있는 애록고지와 관련 있는 말들이었다. 애록고지, 지도 상에서 1cm채 되지 않는 곳을 위해 죽어나간 이들이 몇일지. 은표의 조그만 머리로는 차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임 중대장이 전사하고 난 후 발령 받은 신임 중대장과 앳된 얼굴의 이등병과 함께 애록으로 달려가면서 은표는 수혁의 목걸이를 꺼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여전히 그를 알아볼 수 있을지 의문도 함께.
-아, 저기 방첩대라고 했나? 거 방첩대에서 여기로 올 이유는 없는듯한데...너도 역시 야망이 있는거지?
-전쟁이 끝나면 우리나라 군인은 둘로 나뉜다. 전장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남자라면 역시 전선으로 달려 가야지!
내 옆의 남자가 유재호 대위랬나. 신임 중대장은 꽤 야망이 있는 사람인 듯 했고, 뒷자리의 이등병은 성인이 되지도 않은 17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먹먹해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은표는 그 유명세를 떨치는 악어중대에 오게 되었다.
수혁이 과연 원래부터 나약했던 남자였을까. 뭔가 이런저런 외부 요인들이 수혁을 나약하게 만든 거 같다. 아무래도 처음 겪는 전쟁에다가 끽해야 이제 갓 성인이고 온실 속의 화초 같았던 사람인 것 같은데 어떻게 능숙하겠어. 물론 은표와 멘탈 차이도 조금 있는듯...
개인적으로 대학 시절 수혁과 은표의 관계는 주로 수혁에게 주도권이 잡혀 있고 그랬을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은표는 자신도 모르게 수혁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게 되고 신경쓰게 되고 뭐 그런. 사실 애록에서 변한 수혁을 보고 놀란 것도 외관은 수혁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또 다른 사람의 분위기를 풍겨서, 자신이 변하지 말라 했음에도 변해버린 수혁 때문에 그런거 아닐까 하는 상상.